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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5·18정신, 어떻게 계승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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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5·18을 통해 깨닫게 된 역사적 의미를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5·18정신’이라고 합니다. 이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해야 할까요?
민주주의와 인권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조항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이 ‘국민 모두가 주인인 민주공화국’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조항은 처음 헌법이 만들어지던 1948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 수정 없이 굳건히 헌법 제1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헌법의 이 내용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는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 대표 사례가 5·18민주화운동입니다. 국가권력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1980년 광주에서 국가권력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의 인권이 유린 되었습니다.
저항과 참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책임을 묻는 재판에서 독일군 장교 아이히만은 ‘자신 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기 죄를 부정했습니다. 계급질서가 명확한 군대에서 명령 은 거부하기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명령과 규칙을 잘 지킨 한 군인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당시 독일 군인은 명령과 규칙을 무조건 지켜야 했을까요?
불복종과 저항은 민주와 인권, 자유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아 니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절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저항하고 적극적 으로 참여할 때에 비로소 ‘민주주의 만세’를 외칠 수 있습니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에 맞서 시민들은 저항했고, 그 결과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수 있었 습니다. 이후 ‘6월 민주항쟁’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촛불집회’를 통해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 당시에도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저항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 쳐 수백만이 넘는 인파가 참여했음에도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됐으며, 경찰도 폭력적인 진압보다는 시민들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전국적인 국민 저항은 결국 정 권을 교체시켰고, 헌법 제1조처럼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촛불 하나는 작고 미약하지만 수백만 촛불이 모이면 거리를 밝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촛불집회에서 확인했습니다.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할 때에 바꿀 수 있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1) 여러분이 생각하는 ‘오월 정신’은 무엇인가요? 각자가 생각하는 오월 정신을 소개하고 그 이유를 발표해 봅시다.
내가 생각하는 ‘오월 정신’
친구가 생각하는 ‘오월 정신’
2) 여러분 일상생활 속에서 오월 정신이 필요한 부분은 어디인지 토의해서 발표해 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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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5·18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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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습니다. 하지만 40여 년 정도 시간이 흐르다 보니 현재는 5·18을 과거의 사실 그 자체로만 배우고 기억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5·18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말을 우리는 쉽게 흘려버리곤 합니다. 과연 5·18민주화운동은 이미 지나간 일회성 사건에 불과할까요? 우리 삶 속에 또 다른 5·18은 없을까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두 나라가 있습니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나치 희생자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통해 유 럽의 과거사 문제 해결과 평화 증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 독일: 당시는 독일 통일 전이어서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이다.
반면에 일본은 총리를 비롯 한 일부 정치인들이 침략 전쟁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전쟁 범죄자 위패가 있는 야 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동아시아 평화를 해치고 있습니다. 과거 잘못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국가와 변명만 하며 스스로 면죄부를 가지려는 나라,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에 서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까요?
역사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되고 기록을 통해 다시 기억됩니다. 윤상원이 전남도청 안 에서 최후의 항쟁을 앞두고 했던 말은 우리가 왜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계승해 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그는 정의와 역사발전을 위해 죽음까지 감수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 속 에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면서 역사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5·18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5·18과 같은 민주화운동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가 종종 제작됩니다. 이들 영상물을 보며 우리는 ‘내가 당시를 살았다면, 나는 시위에 참여하여 국가폭력에 맞설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시위에 참가한 영상 속 주인공을 특별한 존재로 여깁니다.
+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그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의 얼굴치고 너무나 평온하고 평범해 보이는 데에 놀랐다. 이를 한나 아렌트는 비판의식이 없는 한 개인이 얼마나 큰 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생각하며 ‘악의 평범성’이라 표현했다.
평범한 개인은 상황에 따라 민주화운동의 참여자가 될 수도 있지만, 국가폭력에 앞장 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앞으로도 우리가 비판의식이 없이 국가 명령 에 순응만 하다 보면 얼마든지 또 다른 5·18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불의 에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길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우리가 민주시 민으로서의 자질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며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 도 합니다.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념을 통한 기억
개인 기억은 유효기간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기억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집단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기억을 재구성해 기념합니다. 1980년 5월의 기억도 시간이 지 나면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기억하려면 기념을 통해 기억 해야 합니다.
5·18과 같이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들을 살아 있는 기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기 념 활동에 청소년들 관심과 참여가 꼭 필요합니 다. ‘구경꾼’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을 만들고 전파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함 께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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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5·18기록물은 어떻게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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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의 일기와 기록의 가치
그렇다면 주로 어떤 기록들이 중요한 자료가 될까요? 정부가 만들어낸 공식 기록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국가폭력이 발생하고 국가 통제와 감시가 심할 때에는 오히려 개인 일상을 펼쳐낸 소소한 기록들이 진실을 찾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개인 일기로 역사에 의미 있게 남은 대표적 사례는 ‘안네의 일기’가 있습니다. 안네는 1942년 13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자신이 처한 삶과 느낌을 솔직하게 썼습니다. 사춘기 소녀의 시점에서 생생하게 기록된 그녀의 일기는 나치 독일의 통치가 유대인들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전쟁 후에 출간 된 그녀의 일기는 전 세계에 번역돼 집단학살과 인권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인류 모두의 소유물인 세계기록유산이 미래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보 전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영국의 ‘대헌장’, 프랑스의 ‘인간과 시 민에 관한 권리 선언’, 앞에서 언급했던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이 세계적으로 유 명한 유네스코 등재 세계기록유산입니다. 우리나라 기록물로는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등과 함께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 습니다. 다음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민주화운동 자료 목록입니다.
이 자료들에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 하였던 정부 측 기록과 함께 시민일기, 성 명서, 기자 취재수첩, 부상당한 시민들의 병원 기록까지 포함되어 있어 5·18을 다방 면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5·18과 관 련한 국회 회의록과 책임자를 처벌했던 대 법원 재판기록,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자료 까지 담고 있어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및 보상과정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1993년 광주시민사회가 합의한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5원칙(진상조사, 가해자 처벌, 명예회복, 보상, 기념사업)’은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규정을 결정하는 데에 모범 사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은 세계 각국 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기에 유네스코는 5·18기록물을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나의 삶을 역사로 남겨볼까요. 어떤 기록물을 토대로 작성하고 싶은가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 중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자료 목록을 선정 이유와 함께 작성해 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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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5·18단체들은 왜 세월호유가족을 격려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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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뉴스에서 팽목항에 걸린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플래카드를 봤어요. 5·18과 세월호 사건은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5·18단체들은 왜 세월호유가족을 격려했을 까요?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 이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동병상련’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아픈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 로, 서로 공감하고 돕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병에 걸리면 아프다는 건 모두 압니 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직접 겪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기 힘듭니 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은 국가권력 혹은 그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에 의해 장기 간 탄압을 받았습니다. 5·18만 하더라도 ‘광주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까 지 무려 20여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5·18정신을 폄훼했던 세력에 의해 유가족들은 상처도 많이 받았고 국가가 했던 부당한 일들 때문에 억울함도 가슴 가득 쌓였습니다.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1987년 경찰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의 아버지가 아들을 떠나보내 며 했던 넋두리입니다. 당시 박종철 죽음을 책 임져야 했던 치안본부는 고문 사실을 숨기려고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 고 발표해 국민들 분노를 샀고, 이는 시민들이 6월 민주항쟁으로 힘을 모으는 데에 중 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원통하고 화가 났을 그의 아버지는 왜 ‘아무 할 말이 없다’라고 했을까요? + 치안본부: 현재의 경찰청 표현의 자유는 모든 권리 주장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국민 권리를 지켜주고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아주어야 할 국가권력이 그 권리를 짓밟고 폭력을 행사한 주체라면 국민 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피해를 당한 사람은 포기하며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말할 힘도 의욕도’ 없을뿐더러 나로 인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미칠 피해가 두렵기 때문이죠. 박종철의 아버지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말’이 차별의 현실과 만날 때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말’로 인해 5·18유가족들과 세월호유가족들은 괴로워했습니다. 일부에서는 5·18 사진들을 희화화하며 유가족을 조롱하거나 저항했던 시민들을 ‘북한에서 온 폭도들’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세월호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바로 옆에서 폭식하며 조롱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픔을 공감합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아들(문재학)을 잃은 김길자 어머니는 5·18묘역을 찾은 단원고 희생 학생 어머니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이미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고등학생 아들을 잃었던 엄마로서 세월호유가족 고통을 가슴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어차피 해결되지도 않을거야.
2) 5·18민주화운동를 통해 기억의 연대를 할 수 있는 다른 나라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요? 3) 다른 나라 민주화 단체와 연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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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지금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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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이면 40년도 더 된 옛날이잖아요. 당시 피해를 입은 분이나 유가족들은 오랜고통에서 벗어나셨나요?
노르웨이 화가 뭉크(1863~1944)의 ‘절규’. 해골바가지 같은 얼굴과 혼돈 속 세상을 나타낸 것 같은 배경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감상하는 내가 불안해지며 귓가에 주인공의 비명이 들려옵니다. 뭉크의 다른 그림 하나를 더 볼까요? ‘죽은 어머니의 아이’입니다. 어머니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80년 5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TV와 신문에서는 5·18을 계속해 서 ‘불순분자의 조종을 받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광주시민들 은 5·18이 일어난 장소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 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될 거 아니냐. 그 때 우리가 깨달은 거예요. 우리가 집 에서 마음 놓고 있을 때에가 아니다. 우리는 싸워야 한다는 것을……” <故 김경철의 어머니 인터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잊을 수도 없다.
5·18처럼 트라우마가 심한 사건은 보상, 기념사업, 책임자 처벌 등 후속 조치가 완벽하게 취해지지 않는 한 당사자들의 심리적 상처는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로 감옥살이를 했던 분이 지금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꿈에 항상 군인들이 나타나 살 수가 없습니다 … 축산업에 실패해 엄청난 생활고를 겪고 있고, 고문 후유증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2006년 5·18유공자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중 55.8%가 트라우마 증상을 보이고 있고, 2007년 조사에서는 5·18과 연관된 사망자 381명 가운데 10.4%인 39명이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한국 평균 자살률인 0.02%의 500배 정도 되는 수치입니다. 또한 당사자의 배우자와 자녀들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트라우마센터가 만들어지다, 하지만……
2012년 10월 광주에 트라우마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기관으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2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졌습니다. 센터의 책임자는 이곳 이용자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곳을 이용하는 분들은 환자가 아닙니다. 고통을 당했지만 이겨냈고, 살아왔고, 우리사회가 그 혜택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분들은 환자가 아닌, 경험을 알려주시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분들입니다.” <광주 트라우마센터장 명지원 인터뷰(2019)에서>
하지만 아직도 5·18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아다니며 치유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제2의 트라우마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5·18유공자들을 폄훼하고 유가족들을 조롱하며, 시민군들을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혐오발언과 가짜뉴스들이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요?
5·18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5·18을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한 진실 규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제입니다. 또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반인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5·18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또 다른 트라우마를 겪지 않을 것입니다.
+ 광주트라우마센터 Gwangju Trauma Center / 062-601-1980 / https://tnt.gwangju.go.kr/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국가폭력 생존자분들이 계셔서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1) ‘상처를 말하는 것’이 왜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요?
2) 경청하고 공감해서 듣는 것이 왜 위로가 될까요?
02. 2005년 UN총회가 채택한 ‘인권침해 피해자 권리장전(반 보벤-바시오우니 원칙)’ 중 일부입니다. 5·18과 관련하여 잘 된 것은 ○, 미흡한 것은 △, 조치되지 않은 것은 X로 표시해봅시다.
1) 피해자 권리장전은 크게 정의에 대한 권리, 피해회복에 대한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으로는, ① 계속적인 침해를 막기 위한 조치 ( )
2) 미흡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조치들 중, 현재 우리 사회에서 5·18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친구들과 이야기해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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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역사왜곡,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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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임을 이제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깎아내리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역사왜곡을 막을 수 있을까요?
역사는 동일한 사건이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여러 의견이 나오는 것과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사료’에 의해서 확정됩니다. 그래서 근거 없이 주장만 하거나 조작된 자 료를 근거로 주장하면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 사료: 역사 연구에 필요한 책이나 유물, 기록 따위를 말함.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논리적으로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는 것을 밝혀내야 합니다."
"그 주장을 뒷받침 할 근거가 있나요? 근거 없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한편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그 전에 먼저 의견과 사실을 명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 일어나는 일’을 의미하고, 의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뜻합니다. 사실을 왜곡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
역사를 왜곡하는 사례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닙 니다. 과거사 정리가 잘된 나라인 독일에서도 간혹 발생 합니다. 그래서 독일은 역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사람 을 처벌하는 법 조항을 1985년에 만들어 놨습니다. 이 법 으로 나치가 저지른 집단학살인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거나 찬양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처 벌하는 조항을 넣어 놨습니다. 유럽연합 역시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 방지협약’을 체결하여 대량학살,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역사왜곡 및 부정에 대응하는 자세
역사왜곡이나 부정이 자행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역사왜곡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 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정확한 조사와 진실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비판적 시민의식을 기르고 가질 수 있도 록 교육여건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함께 이뤄지면 분명 역사왜곡과 부 정은 우리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다음 제시문을 살펴서 생각을 열어봅시다.
01. 유럽 각국에서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이 만들어진 배경을 찾아봅시다. 02.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률 제정에 대한 찬반 입장을 들어본 뒤 각자가 주장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토론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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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근거 - -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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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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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은 지금도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5·18유공자에게만 과도한 혜택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가요?
5·18은 북한군의 소행?
5·18을 부정하는 일부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광주시민이 아닌 북한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600여명의 북한 특수부대원이 광주로 내려와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고, 광주시민들은 선동에 휘말렸을 뿐 자발적으로 시위대를 구성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에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들을 나열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사실일까요? 일부 언론 및 단 체 혹은 개인들의 이러한 주장에 국방부는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진상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라고 공식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유언비어는 계속 만들어져 유포되 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신정권이 무너진 혼란을 틈타 전두환과 신군 부세력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 다. 이에 항거해 전국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그 상징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5·18민주화운동입 니다. 이 항쟁의 의미를 훼손하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왜곡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70~80년대 군사 독재 정부의 정당성 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 행동할 겁니다.
5·18유공자에게만 과도한 보상을?
5·18유공자들이 다른 국가 유공자와 달리 과도한 보상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6·25전쟁 참전유공자보다 5·18유공자가 월등하게 많은 보상금과 연금을 받는다는 내용이지요. 또한 여기에는 ‘5·18유공자의 자녀가 취직시험에서 10% 가산 점을 받고 있어 과잉이다’라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16년까지 5·18유공자 5,801명에게 1인당 평균 4,300만원 정도 보상금이 일시금으로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5·18유공자에게 연금을 제공하는 제 도는 없고요. 4,300만원은 2019년 최저임금으로 계산해 보면, 직장에 갓 들어간 젊은 이의 2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국가폭력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못한 채 수 십년을 살아온 피해자들에게 이 금액이 과연 과도한 보상일까요?
한편 5·18유공자 자녀들의 취직 활동 때 부여되는 가산점은 5%입니다. 이는 독립유공자, 특수임무유공자의 가족들이 받는 혜택과 동일한 점수입니다. 2017년 기준으로 각종 국가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아 취업한 5·18유공자 및 그 가족은 총 391명입니다. 이 숫자는 가산점 혜택으로 취업한 전체 국가유공자 및 가족의 1.2%에 해당합니다. 어때요? 그들의 말대로 5·18유공자에게만 특별혜택이 주어졌나요?
모든 국가유공자는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률을 통해 그 지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5·18유공자라고 해서 다른 유공자에 비해 특별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5·18유공자에게만 과도한 보상을 해준다는 왜곡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을 분열시키고 국민과 편을 가르려는 행위입니다.
5·18유공자 중 폭도나 가짜 유공자가 있다?
한편 일부 단체나 사람들은 ‘5·18유공자 중에 폭도나 가짜 유공자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일부 정치인이 동조하고 있고요. 이들은 5·18유공자 선정기준과 절차가 투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북한군 개입여부 또한 밝혀야 하기에 5·18유공자 명단은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떠한 주장이든지 본인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펼치려면 확인된 사실을 밑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본인 혹은 사설 단체의 이익을 위해 왜곡된 사실을 무작정 퍼트리는 것은 결코 우리 사회발전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을 전제로 한 주장이 바른 여론을 조성해 나가는 기본 조건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겠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다음 대화를 보며 생각을 열어 봅시다.
"하지만 신군부에 가담한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하잖아. 무엇이 진실일까?"
01. 아래 글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 왜곡인지 자료를 수집하여 판단하고 그 근거를 제시해 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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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5·18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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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5·18민주화운동이 오늘날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해주셨어요. 5·18민주화운동 이후에도 군사정권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선생님은 5·18민주화운동의 영향과 의미를 높이 평가할까요?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이후 전두환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대거 체포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정권의 등장에 방해가 되었던 5·18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언론을 통제하며 5·18민주화운동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이후에도 수백 명의 광주시민은 국가기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5·18유가족들은 진상 규명 요구도, 망월묘지에서 추모식을 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감추기에 5·18민주화운동은 너무 큰 사건이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외신에 의해 사건 진상이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위 시는 김준태 시인이 1980년에 창작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의 일 부 내용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최초로 다룬 문학작품이죠. 5·18이후 민주화운동 에 나섰던 사람들은 시의 내용처럼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였더라면 그들처럼 저항할 수 있었을까?”, “진실을 알고도 외면해야만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졌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 더 힘을 쏟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광주의 민주화 요구를 군홧발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은 사회 각 부문에서 민주화 열 망이 불타오르자 강력한 탄압으로 잠재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문치사와 같은 각종 인권유린 행위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는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 졌습니다. 6월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군사정권의 강압정치를 더는 참지 못하고 대통 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자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5·18 때처럼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 로 진압할 수 없었습니다. 더 큰 저항을 불러와 자기 정권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5·18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6월 민주항쟁의 요구사 항인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점차 민주화를 이 루어왔고 오늘날과 같은 민주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친구들과 함께 인물카드를 만들어봅시다.
김태훈 박관현 박래전 조성만 표정두 홍기일
내용을 읽고 5·18민주화운동과 2016년 촛불집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야기 나눠봅시다.
▲ 공통점 :
▲ 차이점 :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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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광주사태’는 어떻게 ‘민주화운동’이 되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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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용어는 비슷한 사건인데도 평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같은 사건도 때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것 같아요. 5·18도 처음에는 ‘광주사태’ 라고 불렀다던데 지금은 왜 ‘5·18민주화운동’이라 하나요?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시민들의 항쟁은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종료되었습니다. 5·18은 열흘간의 항쟁으로 끝이 난 듯 보였지만, 이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면서 오히 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5·18을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5·18이 북한과 연결되어 있음을 언론 에 흘리면서 안보위기를 만들어 국민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다음은 전두환 정권 당시 통일부장관이 통일연수에 참가한 대학생들에게 했던 강연의 일부입니다.
“북한은 우리 사회의 변화기를 이용, 분열과 혼란을 획책하여 제2, 제3의 광주 사태 를 조성하는 베트남식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북한으로부 터의 위협과 국가적, 국제적 자유주의라는 두 개의 도전을 극복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우리 사회 내에 만연된 각종 병폐를 척결하여 새 질서, 새 체제를 창출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다.” 〈동아일보(1980.8.11.)에서>
이처럼 전두환 정권과 언론을 통해 만들어진 5·18에 대한 왜곡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에 무엇보다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도 록 5·18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배상, ▲명예회복, ▲정신계승을 위한 기념사업이라는 ‘광주문제 해결 5원칙’이 1993년 만들어졌습니다. 이 원칙 중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1994년에 5·18기념재단이 만들어졌고, 5·18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시민 사회단체의 노력도 본격화되었습니다.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위한 고소와 고발이 이어지며 검찰도 수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검찰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법기관이 당시의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 위법 여부를 판단할 경우, 헌정 질서와 법질서의 단절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고, 정치·사회·법률적으로 중대한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습니다. 검찰 발표에 반발한 시민들은 ‘5·18특별법’을 만들어 책임자를 처벌하자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국민들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995년 10월에 전두환, 노태우가 비자금을 불법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김영삼 정부는 더는 특별법 제정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재판을 통해 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이었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동적 시위진압행위’였다고 최종판결을 내렸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검찰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5·18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는 다른 역사적 사건의 진상 규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보다 앞선 사건이지만 아직도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제주4·3사건’, ‘여수·순천10·19사건’, 강원도의 ‘사북사건’ 등이 진상 규명과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5·18이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바꿈되는 과정에서 보여줬던 시민들의 연대와 공감이 더 필요합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한 사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는 것이 어렵고 적절 한 이름을 붙이기도 힘듭니다. 5·18도 처음에는 ‘폭동’, ‘광주사태’로 불리다가 시민들 노 력으로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래 용어의 의미를 알아보고 모둠별 로 역사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찾아 발표해 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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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위한 행진곡’은 어떻게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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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에 5·18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게 된 것은 노래에 얽힌 인물들 때문입니다. 1970년대 한국은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고통을 받으며 일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전남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박기순은 노동자들의 이런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학생으로, 이들을 도울 방법으로 야학을 생각했습니다. ‘야학’이 뭐냐고요? 청소년 노동자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을 대상으로 야간에 수업을 하는 비인가 학교를 말합니다.
들불야학과 5·18민주화운동 박기순은 사망했지만, 들불야학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녀의 권유로 야학 교사가 되었던 윤상원이 다른 교사들과 함께 야학을 이끌었습니다. 사회의식이 뚜렷했던 들불야학 구성원은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부당한 권력에 맞섰습니다.
5·18 당시 이들의 활약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습니다. 언론들이 왜곡 보도를 일삼자 윤상원과 박용준은 들불야학 사무실에서 ‘투사회보’를 만들어 광주의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렸습니다. 또한 윤상원은 항쟁 지도부에서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다가 27일 전남도청이 점령당할 때에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박용준도 끝까지 저항하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김영철과 박효선 역시 항쟁 지도부의 기획실장과 홍보부장으로 활동했으며, 박관현과 신영일은 5·18민주화운동 이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진상규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들불야학에서 배운 학생들의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투사회보의 인쇄와 보급을 돕고 시민군으로 활동 하며 계엄군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 광주 5·18자유공원에 세워진 들불 7열사 기념비를 찾아보세요.
‘님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지다.
하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저항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이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돼 있다고 하니, 국가보훈처의 이 주장은 참으로 옹색한 변명일 뿐이었습니다. 또 북한 찬양 논란이 있다고 하면서도 5·18기념식장에서 합창단이 부르는 것은 허용했으니, 보훈처의 주장은 모순투성이었습니다.
이 논란은 무려 9년을 끌다가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해결되었습니다. 이 해 5·18기념식장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참석자 모두가 함께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매년 제창되고 있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러진 사연들을 살펴보니 더 애착이 가지 않나요?
생각을 넓혀가요
02. ‘님을 위한 행진곡’을 토대로 노래극을 만들어 공연해 봅시다.
1) 노래극을 구성할 요소에 대해 친구들과 토의해봅시다.
2) 위에서 논의한 내용을 간단하게 줄거리로 정리해 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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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은 왜 광주를 상징하는 음식이 되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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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광주 대표음식 중 하나로 ‘주먹밥’이 TV에 소개되는 장면을 보았어요. 주먹밥은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광주를 대표한다고 하니 조금 이상했어요. 어떻게 해서 주먹밥은 광주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나요?
주먹밥이 광주를 대표한다니 놀랍죠? 이 음식이 광주를 상징하게 된 이유는 맛도 맛이지만 음식에 5·18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1980년 이전만 하더라도 다수의 시민은 거리에서 하는 정치투쟁은 대학생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민들은 대학생들의 시위에 응원은 했을지언정,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5·18 당시 계엄군은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이를 목격한 시민들은 처음에는 놀라 움츠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계엄군의 불법적인 폭행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시민들은 정의감을 바탕으로 계엄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늘어났고, 투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시민들도 음료와 빵 등 간식거리를 마련해 시위대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식사 때가 되면, 거리에는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모인 사람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당시 대학생 강주원의 증언에서>
위의 증언처럼 시위대와 시민들은 서로를 돕고 격려하면서 점차 ‘공동체’라는 인식을 키워나갔습니다.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물러난 이후 외곽도로를 차단해 광주를 고립시키자 더욱 빛이 났습니다. 외부와 교류할 수 없었던 광주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필품 부족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생존을 위해 필요한 쌀이 부족했습니다. 흔히들 이런 상황에서는 특정 개인이 물건을 독점하거나 대량으로 사두어 혼란을 부추기는 사재기 현상이 많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당시 광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시민군 박남선의 증언에서>
02. 당시 내가 광주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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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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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계엄군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응 사격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말일까요? 5·18 당시 시민들은 정말 총을 들 수밖에 없었을까요?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시민들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처음부터 총을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항쟁이 시작된 80년 5월 18일,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평화적으로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계엄군의 진압이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지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돌과 화염병 등을 던지며 계엄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계엄군은 시민들이 무장을 하자 일단 광주 외곽지대로 병력을 이동했습니다. 그들이 시내에서 빠져나가자 투쟁했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수습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계엄군과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협상 과정에서 ‘무기 반납’을 둘러싸고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원활한 협상을 위하여 무기를 반납하자는 측과 계엄당국을 믿을 수 없으니 협상이 끝날 때까지 가지고 있자는 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강제 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하여 총기 자진 회수를 결의하여 시중에 풀린 총기들을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총기들은 항쟁 기간 내에 대부분 회수되었습니다.
“누가 강요를 해서 무장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시민들 스스로 생명을 지키고 또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한 것입니다. 군부 쿠데타에 의한 권력 찬탈의 음모를 분쇄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봉기한 것입니다. …… 우리는 무한정으로 피를 흘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평화적으로 이 사태가 해결되기를 희망합니다.”
01. 다음 제시문에서 밑줄 친 ‘모든 형태의 폭력과 재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비난받아야 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02. 다음은 5·18 당시 총기 반납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A. "계엄군이 강경하게 나오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무기를 반납하고 계엄군의 사과를 받아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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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저항한 군인은 없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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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사진이나 영상 속 군인들 모습이 너무 무서워요. 모든 군인들이 상관의 명령에 따라 광주시민들을 위협했나요?
군인 본연의 임무는?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여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영토를 침략하는 적과의 싸움에서만 그래야지, 국민을 상대로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군인들이 싸우는 이유는 외부 적으로부터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니까요. 그런데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권력을 가진 정치군인들의 명령에 철저히 따르며 시민들을 적대시했습니다. 이건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계엄령과 공수부대
계엄령은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에 대통령이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군대를 이용해서 치안을 유지하는 조치를 말합니다. 계엄령이 내려지면 계엄사령부가 설치돼 선포 지역 주요시설에 군대가 주둔하고 계엄사령관에게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또한 계엄당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어떤 사람도 체포나 수색을 할 수 있었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 고개 숙인군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충정훈련 도중 진압봉으로 머리통을 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습니다. 위에서 명령내리는 대로 훈련에 열중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훈련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하루 속히 실전에 투입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80년 당시 7공수 35대대 소속 박모 중사 ‘중앙일보’(1995.12.29.)기사에서>
“충정훈련을 받을 때마다 대대장, 중대장이 정신교육을 통해 ‘광주에서 소수 빨갱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시위대는 모두 빨갱이니 때려잡아야 한다.’고 정신교육을 했습니다.” <80년 당시 3공수 16중대 소속 이모 중사 ‘중앙일보’(1995.12.29.)기사에서>
옆에 실린 기사는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되었다가 정신적 후유증을 앓게 된 사람의 호소 내용입니다. 그는 자꾸만 떠오르는 희생자들의 모습과 죄의식으로 제대 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어서 대학을 중퇴해야 했으며, 결혼은 3년 만에 파경을 맞았습니다.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말도 하지 않았고 매년 5월 18일만 다가오면 우울증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처럼 계엄군도 5·18 이후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한편 계엄군이었던 최영신은 자신의 상관이 주남마을 민간인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1989년에 양심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2019년에는 80년 당시 미국 군사정보관이었던 김용장과 당시 보안대에 근무했던 허장환도 본인들이 알고 있던 5·18 당시 광주 진압작전을 증언하여 진상을 파악하는 데에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때에 모든 공권력이 계엄당국의 부당한 명령에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광주와 전남 경찰 총 책임자였던 전남경찰국장 안병하는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에게 난폭한 언행을 삼갈 것을 강조하면서 경찰은 언제나 ‘시민의 경찰’이어야 함을 상기시켰습니다. 또 계엄사령관이 안국장에게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광주시 민들로부터) 접수하라”고 지시했을 때에도 “경찰도 시민군 안에 형제, 가족이 있을 테 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접수할 수는 없다”라며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시 불이행으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야 했으며 해직까지 당했습니다. 또한 해직 이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8년간 병원에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02. 안병하는 2003년이 되어서야 5·18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 늦게서야 유공자로 인정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위진압에 투입된 군인들이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밝힐 수 있게 우리 사회가 지원해 줄 수 있는 방안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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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추모비가 왜 5·18구묘지에 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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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5·18구묘지 입구에 있는 추모비의 주인공은 영화 ‘택시 운전사’의 모델인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입니다. 그는 본인이 죽으면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200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5·18기념재단에 맡겼습니다. 그가 사망하자 가족과 5·18재단은 그를 기려 5·18구묘지 입구에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추모비 아래에는 그가 재단에 맡긴 손톱과 머리카락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인 힌츠페터는 왜 고향에서 머나먼 광주 땅에 묻히기를 소망했을까요?
월요모임과 5·18
5·18 당시 광주소식은 계엄당국의 보도 통제로 인해 국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일본에 있던 힌츠페터는 광주소식을 접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한국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이 결성한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 때문이었습니다.
월요모임의 활동은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보내 항쟁 현장을 있는 그대로 조사하여 세계 사람들이 알게 했습니다. 또한 모임의 주요 회원들은 미국의 언론 매체들에 5·18민주화운동과 한국의 인권상황을 지속적으로 실어 전두환 정권의 추악한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한국 정치현실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02. 독일 방송국 기자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 5·18현장을 직접 와서 취재했을까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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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여성들은 어떤 행동을 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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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광주 여성들의 사회참여 활동
1970년대는 박정희 독재체제였습니다. 당시 독재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다수 감옥에 갇혔습니다. 광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습니다. 이때에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광주에서는 ‘송백회’라는 여성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송백’은 ‘소나무 송(松)’자에 ‘잣나무 백(栢)’자로 소나무나 잣나무처럼 늘 푸르고 곧게 살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모임 회원은 구속된 민주의사의 부인들과 여성 노동운동가, 독재타도를 위해 나선 여학생들이었습니다.
또한, 여성들에게 배움의 터를 제공했던 YWCA(기독교여성단체)와 노동자 들을 위한 들불야학과 백제야학, 문화운동을 하던 극단 광대, 농민운동에 앞장섰던 가 톨릭청년농민회(JOC) 등에도 여러 여성들이 단체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여성들은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광주에서 최초로 정향자, 이정희 여성노조지부장이 나왔습니다. 이들의 조직활동 경험은 5·18 당시 여성들이 홍보와 지원 등 여러 활동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5·18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여성들
5월 22일, 광주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놀란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시내에서 철수했습니다. 이때에 여러 명의 여성 노동자와 여고생이 항쟁 지도부가 있는 전남도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시민들의 제보를 바탕으로 사망자 명단을 작성하고 시신의 신원을 파악하여 방송하는 일을 했고 취사 활동을 전담했습니다.
“민주화, 민주, 민주주의라는 의식이 아직은 명확하게 생기기 전이니까 그거보다 어떤 정의롭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군이 자기 국민을 향해서 총을 쏠 수 있는가. 그 부분에 대해서 이해가 안 갔어요. 도청 앞에서 집회를 하는데 모집을 하더라구요. 그 뭐지 식사를 준비해야 될 사람이 모자라니까 모집을 했어요. 거기에서 같이 들어가게 된 거에요.” <주소연 인터뷰(2000.2.25.)에서>
항쟁이 일어나자 여성들은 즉시 다양한 운동조직들이 결합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YWCA는 넓고, 도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여성들의 활동 중심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대자보 및 성명서 작성, 선전활동, 취사 등의 활동과 도청 앞 분수대에서 열린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여성들도 단상에서 자기 의견을 밝혔습니다. 임영희는 민주화여! 시를 낭독하여 시민들을 감동하게 하였고, 홍희윤은 여성대표로 광주시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시민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보다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방송으로 독려한 것도 여성들의 주된 활동이었습니다. 일부는 시민군과 함께 차를 타고 나가 무기를 모으는 일에도 참여했으며, 차별 대우를 받던 유흥업소 여성들도 헌혈활동과 상무관의 시신을 염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 외에 병원과 투쟁현장을 포함한 광주 곳곳에서 많은 여성들이 항쟁 내내 함께 했습니다.
“모금조, 선전홍보, 헌혈, 병력. 어떻게 하면 총을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모을 것인가, 또 선전홍보, 날마다 도청 앞에 모이는 많은 시민들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이 광주의 상황을 어떻게 외부에 알려서 우리가 고립되어 있는 상황을 알려서 광주 항쟁과 같은 이런 상황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켜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 식량공급, 식량 배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장기화 됐을 때에 문제들에 대한 고민……” <이윤정 인터뷰(1999.8.10.)에서 >
27일 도청진압 이후 신군부는 5·18가담자들을 ‘폭도’라고 하며 체포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한 사람, 길거리 방송을 했던 사람, 송백회 회원 등 40여 명의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항쟁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어머니들은 항쟁 이후 신군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앞장서서 ‘5·18유가족회’를 만들어 진상규명운동에 나섰습니다.
1985년 12월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약칭 민가협)’가 전국단위로 만들어졌습니다. 5·18로 인해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가족도 이 단체에 적극적으로 결합해 구속자 석방운동을 벌였는데, 여기서도 전면에 나서서 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인사 조기 석방을 요구한 사람들은 여성들이었습니다.
영웅이 아니라 시민이었기에
5·18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항쟁 이후 진상규명을 위해 힘쓴 여성들은 영웅이 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본인들이 했던 일에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민 한 사람으로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다음은 5·18에 참여했던 한 여성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직접 총을 든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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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들도 시위에 참여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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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은 모두 학생?
+ 취학률: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된 인구 가운데 각급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의 비율
+ 투사회보: 들불야학에서 활동하던 윤상원 등이 제작하여 배포한 소식지로,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대안 언론의 기능을 수행했다.
이런 활동 외에도 청소년들은 5·18 당시 부상자를 돌보았고 도청으로 가족을 찾으러 온 시민들을 안내했으며 헌혈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또한 항쟁 마지막 날인 27일 새벽까지 도청을 지킨 청소년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안타깝게도 계엄군의 진압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청소년들이 5·18에 참여한 이유
“엄마, 창근이가 죽은 것 같아. 창근이 생각을 해서라도 여기서 더 심부름하다가 갈게.”
친구를 잃은 슬픔과 분노, 시민들을 위하는 마음이 문재학을 도청에 계속 머무르게 했던 것입니다. 다른 청소년들도 시위과정에서 사라진 친구, 가족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청소년들이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성숙한 모습은 성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청소년들도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02. 그동안 참여했던 사회참여 활동이 있다면 그 내용을 간단히 적고 참여 경험을 친구들과 나눠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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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언론들은 5·18을 어떻게 보도했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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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0일 저녁, 광주 한 방송국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같은 날, 광주에 본사를 둔 신문사 기자들은 신문제작을 거부했습니다. 도대체 당시 언론사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언론통제와 왜곡 보도
+ 검열제도: 대중매체의 내용물이 만들어지기 전이나 후에 국가 권력이 내용을 검토하여 그에 상응하는 통제를 했던 제도
1980년 5월 18일 이후 공수부대의 진압이 광주 시내에서 계속되고 있었지만,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의 보도내용은 사실과 달랐습니다. 특히 5월 19일 MBC에서 ‘계엄분소의 발표’라는 자막을 붙여 방송한 내용은 광주 시민들을 크게 분노하게 했습니다.
한편 지역 소식을 가장 빠르게 전달하던 지방 신문들도 보도검열로 인해 광주의 진실을 단 한 줄도 신문에 실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에 광주에 본사를 둔 신문사 기자들은 분노하며 좌절했습니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는 진실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던 기자들의 당시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동안 계엄당국의 보도통제로 인해 광주기사를 한 줄도 내보내지 못했던 신문들은 5월 21일 저녁부터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을 조금씩 보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기사들은 계엄사령부가 제공한 자료에 의존했기 때문에 대부분이 왜곡된 보도였습니다.
+ 투사회보: 들불 야학에서 활동하던 윤상원 등이 제작하여 배포한 소식지.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에 대안 언론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목포선 복면 쓰고 시위 등이 써있었다.
오늘날에도 진실을 외면한 채 왜곡 보도를 일삼는 언론들이 있습니다. 이런 보도를 접한 일부 사람들은 왜곡 사실을 지적하며 정정 보도를 요구하지만, 한편에서는 일부 언론의 가짜뉴스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냉철한 시각으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박총리 TV 담화 “광주는 치안부재 상태, 김종필· 김대중씨는 포고령 위반 연행”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22일 “광주는 지금 치안부재의 상태”라고 말하고 “국민 여러분은 적의 오열이 만들어내는 유언비어에 속지말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계엄사 25일 발표문 ‘광주사태 계속 긴장’
계엄사령부는 25일 저녁 8시 발표문을 통해 광주소요사태는 질서가 잡혀가는 듯 했으나 이날부터 과격파 난동자들이 회수된 무기와 탄약을 재차 탈취하고 강경한 투쟁을 선동함으로써 살벌한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다고 밝혔다.
계엄사 발표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난 5월 18일 수백명 학생의 평화적 시위로 시작된 광주 일원의 소요사태는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광주 일원에 잠입하여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시키고 파괴·방화를 선동하며 방위산업체의 군사 장비와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를 탈취하도록 자극하고 앞장섬 으로써 시위사태는 폭도화되어 유혈 사태를 야기 … 강경파 폭도들은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 외에도 깡패, 양아치, 건달 등 불량배들로 구성되어 있어 이들은 약탈행위를 자행 … 이들은 나이가 19~20세에 불과한 자들이 많아 군대 경험이 없어 무기를 제대로 조작 못 함으로써 오발 사고 가 비일비재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음.”
01. 옆 면에 제시된 보도문 속에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왜곡된 부분이 있습니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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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은 광주에서만 일어났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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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각 지역을 방문하다보면 곳곳에서 5·18기념물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전남 제2의 도시였던 목포시에도 여러곳에 5·18기념물이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광주 이외의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나요?
전남 각 지역으로 확산된 5·18민주화운동
+ 너릿재: 광주와 화순을 연결하는 고개
전남에서 시위가 가장 크게 일어난 곳은 목포시였습니다. 기독교 단체가 중심이 된 시민민주투쟁위원회가 목포역 광장에서 궐기대회와 횃불 시위를 주도하며 민주화 투쟁을 했습니다. 함평군에서는 함평읍 장날인 5월 22일 함평군민 궐기대회가 열렸고, 신광면과 대동면에서는 자체 시위대가 조직되어 차량 시위를 벌였습니다. 목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무안에서는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차량이 거리홍보를 시작하자 그들과 합세한 지역민들이 군내를 돌며 항의 시위를 했습니다.
+ 우슬재: 해남읍 해리와 옥천면 영춘리 경계에 있는 고개
목포 지역의 5·18민주화운동
당시 목포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 지도자는 시내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안철이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꾸준히 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던 그는 경찰과 긴밀히 협의해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되게 했습니다. 이때에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의 상황 대처도 적절했습니다. 그는 시위가 확산되어 목포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태가 됐을 때에도 “절대 시민을 향한 발포를 금지한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목포 경찰은 시위가 끝나는 날까지 이 명령을 지켰습니다. 만약 이 서장이 신군부 세력의 의도대로 강력대응을 했다면, 목포도 광주처럼 분명 피해가 컸을 겁니다.
광주에서 전남도청이 진압된 27일 오전에도 목포에서는 시민궐기대회가 목포역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이때에 ‘우리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 결의문’을 채택하고 2만여 명의 시민들이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위 이후 집행부는 목포에서의 민주화운동을 중단했습니다.
이미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계엄군에게 진압된 상태였기에 수많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이후 시위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28일 새벽까지 소규모로 이어졌지만, 시민 보호를 위한 지도부의 끈질긴 설득으로 시위대는 완전히 해산했습니다. 이로써 1주일 동안 지속된 목포 5·18민주화운동은 그 막을 내렸습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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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5·18민주화운동은 왜 일어났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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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발생 배경이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왜 광주에서 시작되었을까요?
1980년 5월 7일, 전남대학교 대강당 앞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 집회를 주관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신군부가 주도하는 정치 현실을 비판하면서 시민과 함께 비민주적인 현재의 정치상황을 해결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다음날인 5월 8일에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며 민주화 요구에 대한 억압을 깨트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선언문을 바탕으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정상적인 수업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수업이 없는 시간에, 휴강을 하게 되면 오후 시간에 집회를 계속 이어가기로 결의했습니다. 또한 휴교령이 떨어지면 명령을 철회할 때까지 계속 투쟁하기로 다짐했습니다.
+ 분수대 광장: 광주시내 중심가에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자리에 1980년대에는 전남도청이 있었다. 당시 도청 앞 큰 도로에 분수대 로터리가 있었고, 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민족·민주화 성회’가 열렸다.
계엄당국은 학생들이 끈질기게 요구했던 비상계엄해제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학내에서만 민주화 시위를 벌였던 학생들은 시민과 함께하지 않고는 신군부에게 그 어떤 충격도 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거리행진을 하고 광장에서 집회를 열며 시민들에게 학생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알렸습니다. 이 당시 거리 행진에서 특이한 점은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수들이 대열의 앞에서 함께 행진했다는 것입니다.
‘민족·민주화 성회’는 16일까지 3일간 열렸습니다. 첫날보다는 둘째 날, 둘째 날보다는 셋째 날 더 많은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이 집회에는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해 “계엄령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쳤습니다.
광장에서 열기를 뿜는 민주화운동
<박관현의 도청 앞 광장 연설문(1980.5.16.)에서>
신군부의 대응
생각을 넓혀가요
01. 다음은 박관현의 ‘민족·민주화 성회’ 연설입니다. 내가 만일 당시 대학생이었다면 이 연설을 듣고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행동
이유
02. 1980년 횃불대행진과 2016년 촛불집회.
1980년 ‘횃불’은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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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정보 ] |
1980년 봄을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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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국민들은 이제 오랜 독재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국민들은 무엇을 기대하며 1980년 봄을 맞이했을까요?
유신체제의 붕괴
1979년이 되면서 유신체제는 급격히 흔들렸습니다.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YH무역사건’과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했습니다. + 석유파동: 1973~1974년, 1978~1980년 2차례에 걸친 국제 석유가격 상승으로 인해 발생한 경제 위기
1970년대 우리나라 주요 수출 품목 중 하나는 가발이었습니다. YH무역은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였습니다. 이 회사는 1979년 8월, 회사 자금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폐업을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폐업이유는 회사 창립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회사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며 자금난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1979년 10월 16일, 김영삼의 정치 기반이었던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민주 화 시위가 대규모로 열렸습니다. 이 민주화운동은 부산과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부마민주항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위진압을 두고 정권 내부에서도 분열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박정희는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인물 중 한 사람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을 10월 26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10·26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18년 넘게 장기 집권했던 박정희 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 신군부: 12·12사태를 일으킨 내란 세력을 새롭게 군사 권력을 장악한 세력이라는 의미에서 ‘신군부’라고 부른다.
생각을 넓혀가요
겨울공화국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 후략 …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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