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EYE

5·18민주화 운동

5·18 열흘간의 항쟁(1980.5.18.~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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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5월 18일, 한반도 서남단의 아름다운 도시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토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어기고 동족인 시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을 하고 폭력적인 군부집단에 맞서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고 불법적인 군인 집단에 저항한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이어진 이 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고, 부상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는 이 비극의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5월 18일에서 27일 사이에 최소 150명 이상의 민간인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80명 이상이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에 있으며, 수천 명이 부상을 당하고, 당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80년 이후에 사망한 사람도 백 명이 넘는다. 군인과 경찰도 26명이 사망했는데, 군사망자는 대부분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에 의한 사고였다.

      이 사건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한 이후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일부 장성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행한 군사반란(쿠데타)의 연장이었다. 이 군인 집단은 1979년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부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국가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이 여기에 항거하면서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불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이 군인 집단은 나중에 박정희 군부독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신군부’라 불렸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정권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행위에 당당히 맞선 이 열흘간의 항쟁은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렇게 명예를 회복하기까지는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이 항쟁을 ‘사회 불만 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의 내란’으로 규정했고, 신군부가 일으킨 내란과 반란 행위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주역들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이후 이 전대미문의 국가폭력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역사적 진실이 국민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6월 항쟁의 산물인 6공화국 정부는 국민 화합을 모색한다는 명분으로 이 사건을 불순분자의 폭동이나 내란이 아닌 ‘민주화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뒤이어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다수당을 점하게 되면서 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회의 조사 활동과 청문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자행한 잔혹한 폭력의 실상과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가 TV를 통해 전국에 방영되었고, 처절했던 10일 간의 항쟁이 민주주의를 염원한 광주 시민들의 숭고한 저항이었음이 알려졌다.


      1993년에 김영삼 대통령은 ‘5.13 담화’라고 알려진 광주 문제 관련 특별 성명에서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오늘의 이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있는 민주 정부”라고 규정하였다. 열흘간의 항쟁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숭고한 시민운동이었음을 천명한 것이다.

      광주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명예를 회복하게 되면서 당시 학살과 인권 유린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광주의 피해자 단체를 비롯한 전국의 시민사회는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세력을 사법적으로 단죄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정부는 1995년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등 가해자 처벌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95-97년에 걸쳐 이루어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가해자 15명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세기의 재판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화와 정의 실현을 위한 열망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세력에 대한 결심 판결에서 신군부는 국가를 전복하여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결성한 내란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반해 광주 시민의 항쟁은 이러한 내란 세력에 맞서서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헌정 질서 수호 행위로서 법적,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밝혔다.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가해자 정권 시절에 내란, 폭동으로 매도되던 사건이 숭고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민주화운동으로 분명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1980년 5월 18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5‧18민주화운동은 현대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독재 저항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운동이었다. 1961년에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군부독재 세력에 저항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의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의 6월항쟁, 2016~17년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둘째, 5‧18민주화운동은 군부집단을 주권자인 시민의 통제 하에 두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1987년의 시민항쟁을 통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권자인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정치 세력화된 군부집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단을 재판에 회부하고 군부 세력의 정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인적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셋째, 5‧18민주화운동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인 저항권의 정당성과 나아가 그 저항권 수호의 수단으로서 ‘무장투쟁’의 합법성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역사와 달리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당한 정치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서 시민의 ‘무장투쟁’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나 1997년에 우리나라 대법원은 초법적인 군부 집단에 맞선 광주 시민의 무장 저항행위는 불법적인 폭동이 아니라 저항권에 기초한 시민 불복종 행위이자 민주화운동임을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비록 우리나라 헌법에서 국민의 저항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재판부의 이러한 인정은 부당한 국가폭력에 맞서는 시민의 적극적인 저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헌법정신과 부합함을 확인해주었다.

      넷째, 열흘간의 항쟁 기간 중 광주 시민들이 보여준 놀라운 자치 공동체 정신은 시민의 자발적 협동과 이타적 나눔의 정신이 민주주의와 사회 질서 유지의 기본 원리임을 증명하였다. 경찰과 행정 등 정부의 기능이 일시 정지된 상태에서도 광주에서는 강력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고,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시민들은 서로 양보하면서 평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헌혈’과 ‘주먹밥’은 바로 이 경이로운 공동체 정신의 산물이다.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이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으며, 국가 차원에서 각종 기념사업을 펼치고 교과서에도 이 내용을 수록했다. 희생된 분들이 묻힌 묘지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고, 항쟁의 현장은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한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최근에는 5‧18민주화운동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5‧18 정신을 반영한 헌법전문 개정안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에 걸쳐서 5‧18민주화운동은 엄청난 왜곡과 폄훼의 대상이었다. 특히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권 하에서 이러한 왜곡과 폄훼는 더 극심해지기 시작하였다. 국가가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일으킨 내란으로 매도되고 있는 형편이다. 심지어 북한군 수백 명이 몰래 침투하여 일으킨 사건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있기도 하다.

      특히, 광주학살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97년의 사법부의 판결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광주학살에 전혀 관련이 없다는 궤변을 주장함으로써 희생자의 명예를 더럽히고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국가가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서 국민들 앞에 그 역사적 의의를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진상규명” 작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아직까지도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 이후 광주에 공수부대를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지,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진두지휘한 자는 누구이고, 광주시민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이며, 1980년 당시 미국은 어떤 역할을 했고, 광주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정확히 몇 명인지, 5월 27일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할 때 그곳에서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등에 대한 핵심적인 진상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행히 2018년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항쟁 4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 사건의 진상을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활동이 추진되고 있다. 이 진상규명 작업을 토대로 이 열흘간의 항쟁은 민주화운동, 시민불복종운동, 아름다운 공동체 운동으로 국민들 앞에서 재조명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은 군부독재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1979년 12월 12일의 군부쿠데타, 그리고 1980년 5월 17일까지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동기가 5‧18민주화운동과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유신체제의 붕괴

    가. 정치적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당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은 기본적으로 군부독재 집단과 국민 사이의 대립 관계가 반영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 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양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 전형적인 군사독재 체제였다. 또한 고도성장 과정에서 도농 간 불균형 발전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생활상의 고통도 매우 컸다.

      유신체제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잘 나타났다.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엄청난 규모의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고서도 유효표의 31.7%를 득표한 반면에 야당인 신민당은 그보다 1.1%가 많은 32.8%를 획득했으며 통일당이 7.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제10대 총선의 충격으로 유신정권은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 면제로 석방되었다.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정치적으로 묘한 대립관계에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하여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들에게 정권 교체의 큰 희망을 심어줬고, 결과적으로 유신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됐다.
    나.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한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간부인 김경숙 씨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중태에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을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원들이 뽑은 대표를 사법부가 독재정권이 내세운 인물로 강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씨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일련의 비정상적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 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 부산‧마산 민주항쟁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일단의 학생들이 ‘유신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로 발전하였고, 이 열기에 고무된 학생들은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여 부산 시내로 진출하였다. 부산시민들은 이 시위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부산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의 상징인 경찰서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는 등 사태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게 되었다.

      10월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리자 이번에는 동아대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에 합류하였고 18일 0시를 기하여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도심으로 진출한 시민·학생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와 함께 “계엄철폐”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하였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정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다. 여기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나중에 광주에 투입된 3공수부대였다.

      10월 18일 아침,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마산에서 경남대생 1,000여명이 휴교령을 무릅쓰고 교내시위를 벌인 뒤 오후 5시경 마산 시내로 진출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대는 수 만 명으로 불어났고, 병력을 추가 투입하여 시위진압에 나섰으나 시위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인 19일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19일 저녁 1,500여 명의 무장군인이 마산 시내에 투입되고 20일부터는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4일간의 “부산·마산민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의 “부산·마산민주항쟁”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1,563명이었는데 이중 500여명은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노점상, 봉급생활자 등 일반시민이었다.
    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부마민주항쟁은 공수부대의 무력에 의해 진압됐지만, 그 충격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유신독재 체제의 종말로 이어졌다. 부마민주항쟁이 끝난 지 1주일 후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은 청와대 인근의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는 부마민주항쟁 수습방안을 둘러싸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공수부대 투입을 성공적이라고 주장하는 차지철과 달리 김재규는 강압적인 탄압으로는 더 이상 유신체제를 존속시키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은 200만 명을 희생시키고도 정권을 유지했는데 우리도 100만 명쯤 못 죽이겠느냐’고 섬뜩한 말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약 부산‧마산의 사건이 다른 대도시로 번지고 서울에서도 진압되지 않으면 대통령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의중까지 내비쳤다. 김재규는 더 이상 이런 강압적인 유신체제를 존속시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겨울공화국’은 일거에 무너졌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국민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에 의해 몰락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거나 대중의 힘에 의해 권력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 권력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 그 자체를 떠받쳐온 세력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밀정보조직, 정치군인집단, 경찰과 검찰을 핵심으로 한 관료집단, 독점재벌, 그리고 유신체제를 후원해온 미국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2. 신군부의 하극상, 12·12쿠데타

      대통령의 유고가 확인되자 10월 27일 새벽 2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헌법에 의해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고, 정부는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바로 계엄공고 제5호를 통해 대통령 저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였다. 합동수사본부는 보안사령부를 포함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등 정부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 지휘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한편 10‧26사건 직후 군 내부에서는 권력기관을 맴돌며 출세만 노리던 ‘정치군인’을 선별해서 숙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치군인’은 박정희 대통령 비호 아래 군부 내에서 최대의 사조직으로 성장한 ‘하나회’를 의미했다. 박 대통령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충직한 사조직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육사 11기 동기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 박정희의 후원을 받으며 육사 졸업생 가운데 ‘영남인맥’의 우수한 장교들만 뽑아 비밀리에 운영했던 하나회는 군 내부의 주요 보직을 독차지하면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최대 후견인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동안 잘 나가던 하나회에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소장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연루된 의혹이 있다며 이를 조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D-day를 1979년 12월 12일로 잡은 뒤 하나회 출신 소장파 장교그룹을 설득, 합류시키기로 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군사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미 정 총장을 연행해 놓은 상태에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정 총장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방부장관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며 재가를 거부했다.

      경복궁의 쿠데타 지휘부는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하고, 육군본부에서 부대를 이탈한 지휘관들에게 부대복귀 명령을 내렸음에도 해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 사실상의 연금조치를 취했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때까지 최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함으로써 전두환 등 경복궁 30경비 단장실에 모인 지휘관들의 정승화 총장 연행은 명백하게 ‘불법행위’ 즉, 하극상의 군사반란이었던 것이다.

      1997년 대법원은 ‘12‧12, 5‧18상고심’에서 정승화 총장에 대한 강제 수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의 체포 목적이 범죄를 수사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위법한 체포행위’라고 판단했다. 또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때 사전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았고, 영장을 발부받을 수 없는 긴급한 사정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법률에 규정된 체포절차를 밟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고 판시했다. 그리고 재가를 받기 위해 집단으로 대통령을 강압한 사실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반항하는 행위로서 ‘반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반란